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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27일 한국전쟁 휴전53주년

조회 : 4,448

등록일2003-07-25 10:58
작성자a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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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에서 세계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은 단지 두 개가 있다고 여겨진다. 하나는 한국전쟁이고 또 하나는 60년대의 경제개발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한국전쟁을 학문적 체계로써 파악하려고 한 노력은 아주 미약하다. 한국전쟁 50주년을 맞는 요즈음 미국에서는 반세기 동안 쌓아온 다양한 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각에서 한국전쟁의 성격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활발하다. 여기에서는 간략하나마 미국 학계에서 한국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미국에서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은 50년 동안 대체로 세 번 바뀌었다. 제1세대의 전통적인 견해는 소련의 도움을 받아서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자 미국이 유엔을 이끌고 남한을 도와서 침략을 격퇴시켰다는 것이다. 1970년대부터 나타난 제2세대는 북한의 남침설을 부정하고, 한국전쟁을 소련의 지도없이 김일성이 독자적으로 수행한 내전으로 보았다. 90년대에 나타나 현재 활약 중인 제3세대는 근본적으로는 제1세대의 견해에 공감하지만 새로운 자료에 의해서 한국전쟁을 더욱 심층분석하고 있다.

제1세대 전통주의자들은 남침에 대한 트루만의 즉각적인 반응에는 찬사를 보냈지만, 왜 그가 전쟁을 끝까지 밀고 나가 북진통일을 이루려했던 맥아더를 해임할 수밖에 없었던가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맥아더는 한국전에 뒤늦게 개입한 중국군을 응징하기 위해, 만주에 있는 중국의 군사시설들을 폭격함은 물론이고, 심지어 핵무기의 사용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암시를 하였다. 중국군은 일본이 만주에 세워놓았었던 병참기지와 군수공장을 대를 물려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트루만은 맥아더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고 38선 이남으로 유엔군을 퇴각시키라는 명령을 하였으나, 맥아더는 이에 불복하였고 곧 이어 직위 해임되었다.

그것은 대통령이 국무부의 외교적 시각을 수용한 결과였는데, 중국과 정면으로 대결하도록 전쟁을 확대하면 배후에 있던 소련을 전투의 전방에 나타나도록 자극시켜, 결국 3차대전으로 비화할 수 있을 위험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학자들은 트루만의 결정은 올바른 것이었다고 암시하면서, 한국전쟁은 결국 38선 이남의 대한민국을 회복하기 위한 “제한적 전쟁”이었다고 정의했다. 그들은 또한 중국군의 개입을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것은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맹점이었으며 이로 인해 심각한 인명피해를 남겼다고 비판하였다.

70년대가 되면서 미국에는 신좌파 사조가 새로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 제2세대의 학자들은 미국사회를 지상낙원으로 보고 자부심에 도취되어있던 기성세대의 안목에 염증을 느끼면서, 미국사회의 문제점을 들추어내면서 그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에 매력을 느끼고 미국사회를 계급갈등론적으로 해부하려고 하였고, 외교에 있어서도 지난 세대가 냉전을 가져온 원흉으로서 소련을 비난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냉전의 원인도 소련의 팽창기도 보다는 미국의 도전적 태도가 더 크다고 보았고 한국전쟁도 이러한 시작에서 재해석하였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에 신좌파적 수정을 가한 대표적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우선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이 끊임없이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북한의 도발을 자극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6월25일 이전에 남북 간에는 휴전선 주위에서 소규모의 충돌이 많이 일어났었는데, 그 날 감행된 북한의 남침을 이러한 무수한 충돌들의 연장선상에서 봄으로써, 어느 쪽이 어느 쪽을 먼저 쳐들어왔는지 분명치 않다고 하였다. 그의 두 번째의 주장은 한국전쟁은 소련의 사주없이 김일성이 주체적으로 수행한 민족해방전쟁으로서, 내전이라고 규정하였다. 그의 주장은 북한의 공식적 견해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980년대에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이러한 신좌파적인 새로운 시각에 상당히 매료되어 있었다. 이 시기의 학자들은 전쟁의 목표와 결과가 “현상유지”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한국전쟁을 “필요 없었던 전쟁”이나 “잊혀진 전쟁”으로 부르며 이 전쟁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신좌파적 해석은 비판을 받게된다. 그것은 공산권의 붕괴로 인한 소련 비밀문서 공개와 천안문 사태이후 신세대 중국인들이 미국에서 활발히 학문활동을 시작하였던 것에 기인한다. 그들은 우선 사료에 근거해서 6·25 전에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허락을 받고서야 남침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확증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전쟁은 내전의 성격을 넘어 “국제전”의 양상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사로서 한국전쟁을 부각시키며 특히 두각을 나타내는 학자는 윌리암 스툭이다. 그는 한국전쟁은 3차대전의 대리전으로써, 3차대전의 발발을 막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요즈음 학자들의 견해는 전통주의자들의 해석과 기본노선이 유사한 점에서 우파적 수정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사료에 근거하여 한국전쟁에 대한 이해를 다각적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제1세대 학자들이 전쟁수행에서 미국이 강력한 힘으로 유엔군을 마음대로 통제했다고 믿는데 반해 스툭은 한국문제에서 유엔회원국들의 다양한 견제가 미국의 정책결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한 북한의 남침설을 부정했던 신좌파의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6월25일 이전에 군사분계선에서 일어났던 산발적인 작은 군사적 충돌들과 이날 북한군 10개 사단이 11개 지점에서 일제히 38선을 넘어온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한반도에서 전면적인 전투의 시작은 북한의 이러한 대규모 침략행위에서 비롯된 것을 주장하였다.

첸지안이나 장슈광 같은 재미 중국인 학자들은 중국의 개입은 유엔군의 북상으로 그들 국경의 안전이 위협받았기 때문이라는 전통주의자들의 해석에 다른 요인들을 추가하였다. 그들은 국경수비라는 수동적 원인뿐만 아니라, 중국이 공산정부 수립 후 국내에서 민심을 효과적으로 수습하기 위해서, 또 대외적으로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한국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고 해석한다. 그 당시 국민당을 몰아낸 중국이 소위 불순분자들을 인해전술의 소모품으로서 한국 전장에 기꺼이 보냈으며, 중국이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맞수라는 강력한 국가 이미지를 조성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최근의 연구들은 결국 한국전쟁은 소련과 중국 그리고 유엔의 적극적 개입이 수반된 국제전이었다는 성격을 강조한다. 요즈음 학자들은 또한 신좌파들이 약소민족에 대하여 갖고있던 동정심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한국전쟁은 대외세력의 갈등구조 속에서 일어났으나 동족상잔이라는 내란의 깊은 상처를 한반도에 남긴 전쟁이라고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전쟁에 대한 연구에는 우리가 배울 점이 많다. 한반도에 관련된 복잡한 국제적 이해관계와 지지부진했던 휴전협상 과정은 통일을 염원하며 협상테이블에 가까이 가려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 aer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4-04-30 14:50)